를 보면 날짜와 일력은 음력 1월 1일부터 12월 30일까지 모두 작성해놓았다. 이것은 1910년 시헌력이 음력으로는 11월 30일에 끝나므로 음력 12월 한달의 일기를 이어서 그 뒤에다 써서 붙여놓은 것이다. 이 자료들의 기본 취지는 한국전쟁에 전투관찰단(Combat Observation Team)을 파견하여 각종 전투와 군사작전, 훈련 등을 참관케 한 이후에, 이에 문제점을 분석하고, 향후 학교교육 및 부대교육에 반영하려는 것이다. Ⅱ. 신안서사 고문서의 사료적 가치와 의미 조선후기 사회변화에 대응해서 기존 사대부들은 향교ㆍ서원 활동이나 촌락별 동계 실시 등을 통해 그들의 영향력을 유지하려 하거나, 가문별로 족보ㆍ문집의 간행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아울러 서원의 운영에 참여한 유생들의 명단 등을 기록한 儒案, 그리고 서원 원생 중에서 일정한 자금을 내고 들어온 이들의 명단인 院生案 등이 있다. 업무와 관련된 주요 인물들과의 모든 서류가 보관되어 있는데, 이 중에는 General Collins, General Clark, General Almond, General Van Fleet 등과 논의한 1950년 말부터 1952년까지 작전관련 자료들과, 한국군 참모총장 정일권, 국방장관 신성모, 대통령 이승만, 주한미군 대사 John Muccio 등과 주고받은 서신, 보고서 등이 포함되어 있다. 1) 다음과 같은 자료의 유형을 포함한다: 브로셔, 절차, 지시 -다음과 같은 전쟁 및 시기를 아우르는 정보를 포함한다: 한국전쟁 -다음과 같은 군 부대와 조직을 아우르는 정보를 포함한다: 유엔사령부 -이 컬렉션은 한국전쟁의 포로 본국송환 관련 문서로 미국인 전쟁포로를 위해 공산측에서 발행한 1950년 이후 사건에 대한 정보 브로셔인 “Troop Information Program for Repatriated US Personnel”이라는 제목의 폴더를 포함한다.

퇴계 이후 金誠一­張興孝­李玄逸­李栽­李象靖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이어받은 柳致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893년 遺逸로 천거되어 의금부 도사에 임명되었다. 특히 새마을운동 같은 경우 1970년부터 시작된 운동이기 때문에 그 이후 자료들이지만 수집을 했다. 따라서 이번 음성군 조사과정에서 현재 파악된 새마을운동 관련 사진과 문서는 새마을운동의 실상을 파악하는데 유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자료는 기존의 연구자들에게서 외면 받아 왔는데, 그 이유는 Doyle 소령이 정책결정자나 주요 지휘관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자료들에는 역사상 최초로 시도된 UN군 사령부와 개별 UN군 부대들에 대한 평가도 포함하고 있는데, 연구자의 관심과 시각에 따라서는 이 자료에 대한 효용성이 증대될 것이다. 이 문서의 Box 20-27까지는 Chronological Files라고 명명되었는데, 여기에는 1950년 12월부터 1951년 7월까지 한국전쟁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거나 혹은 특별하게 취급되었던 모든 순간들에 대한 Appleman의 관심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2) Daniel G. Doyle 소령은 1950년 7월부터 1951년 3월 사이에 대구에 새로 개설된 제1 훈련소에서 한국군대의 신병을 양성하며, 새로운 한국군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던 미군 군사 고문단 (U.S. 이를 위해서 미국 육군은 17개 병과학교와 3개의 참모교육 기관등에 참관단을 파견할 것을 지시하였고, 1950년 8월말부터 전투참관이 시작되어 휴전이 이루어지기 직전까지 총 50여 개 참관단이 한국을 방문하였고, 각각의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 자료들은 대부분 미군 병사 및 장교들이 개인별로 수집한 것을 기증한 것이며, 가끔 원본이 포함된 파일도 있으나, 대부분 2차 연구 및 복사된 사료들이 중심이다. 또 계원은 한번 나간 뒤에 다시 들어올 수 없으나 만약 계에 다시 들어오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이 나가는 것을 기다려야 다시 들어올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광주오피 院生錢傳與記가 있는데, 이는 원생들이 서원에 들어올 때 낸 금전에 대해서 관리, 운영하는 기록으로써 서원의 자금 운영을 아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이 가문에 남아있는 고문서의 대부분은 19세기 중반 이후 심규(沈鍷)가 작성했거나 그를 주인공으로 한 것들이다. 봄에 가뭄이 들어 걱정스러운 마음에 들판에 나갔더니 상황이 좋지 않아 걱정이라던가, 집안 어른에게 토지를 방매하는 일은 신중하게 처리해 달라고 부탁하는 내용, 관직에 나가 있는 부친에게 알리는 가뭄으로 이앙조차 하지 못해 걱정이라는 내용, 개항 이후 서울의 물가가 크게 올라 걱정이라는 내용 등이 들어있다. 1955년 그의 퇴임 이후 1993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리지웨이는 작가, 전 장군, 장교, 정치인, 예비역 협회 등 많은 사람들과 서한을 주고 받았다. 2)한국전쟁 시에 주한미군 사령관, 미 극동군 사령관 및 유엔군 사령관을 겸임했고, 이후에 NATO 사령관 등 미국 육군의 중요한 보직을 역임했던 Mattew B. Ridgway의 문서는 이 연구소에서만 유일하게 이용할 수 있는 대표적인 문서이다. 에 수록되어 있는 각 훈령, 조회 등의 목록은 첨부해 놓았다. 이중에서도 미 제8군의 지휘, 1.4후퇴, 맥아더 해임, 반격작전, 미군 및 UN군 증원, 전투력 향상, 정전회담, 등의 주제에 관한 자료가 주종을 이룬다.

이들은 정씨 가의 묘때문에 마을에 물이 끊어지는 등의 재앙이 일어났다고 주장하여 測量을 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있다. 이 책들은 밀양변씨 가의 사회ㆍ문화적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요원이었다. 이 문서의 총 5개 Box 모두에 한국관련 자료가 들어있으며, 대부분은 Doyle 소령이 제1훈련소를 설치하고, 교육훈련 프로그램을 완성하고, 거기에 맞춰서 신병을 양성하는 과정에서의 업무에 관련된 자료들이다. 교지를 제외하면 양에 있어서도 소량으로 평균적인 문중의 소장 고문서량에 비견할 바가 되지 못하지만, 이 가계의 소장 고문서 중에는 자료의 성격뿐만 아니라 이 가계의 내력을 명확히 밝혀주는 몇몇 주요 자료가 있다. Box 22에는 리지웨이가 한국에 부임한 이후에 한국에서 발생한 중요일정에 관련된 자료가 포함되어 있는데, 대부분 8군사령관으로서의 임무이다. Box 32와 36에는 주한미군 사령관과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리지웨이가 한국에 부임한 이후에 업무와 관련하여 수행한 연설문, 공식 보고서, 언론 보도 자료 등이 보관되어 있다. Box 17, 18, 19에는 대부분 8군사령관, 극동군사령관으로서 주고받은 편지, 연락문서 등이 들어있다. 이 자료들은 대부분 한국전쟁에 관한 모든 부분을 언급하고 있으며, 매우 중요한 자료들로 취급되어야 할 것들이다.